매호별곡의 이재 조우인

김정찬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 국사봉 일대는 이재 조우인이 인조 임금으로부터 매호십리강산梅湖十里江山을 국록國祿으로 받은 지역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곳은 MRF 낙동강 700리 이야기길이 개통되었다. 주변의 볼거리로는 낙동강 700리 시작공원, 퇴강 천주교 성당, 임호정, 조우인 문학비, 어풍대 등이 있다.

매악산 표지
매악산 표지

 

 공은 이름[휘諱]이 우인友仁이요, 자字는 여익汝益이다. 부친 휘 몽신夢臣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평산 신씨로 1561년에 예천군 노포리蘆浦里에서 공을 낳았다. 태어난 지 열흘쯤 지나 모친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다. 4세 때에는 곧잘 시를 지어 대우對偶를 맞출 줄 알았는데,
구름은 푸른 산의 머리를 가둬버리고 雲囚碧山首
연기 노을은 저녁 강의 허리를 가로로 잘랐도다 煙割暮江腰

라는 시구를 짓자,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1588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거를 통해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에 보임補任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파직을 당해 시골로 돌아왔다. 1600년에 유지有旨에 응하여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1605년에 정시庭試에 등제登第하였다.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관례에 따라 박사博士에 이르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그 뒤 사헌부 감찰과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를 거쳐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은계 찰방銀溪察訪을 역임하였다. 1616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경성을 개축改築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게 되었다. 1621년에 우연히 분정원의 임시 관원으로 입직入直하게 되었는데, 이렇듯 황폐화되고 적막한 고궁故宮에 대비가 유폐幽閉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회에 젖어 글 한 편을 지었는데, 거기에

쓸쓸한 풍경 속에 / 蕭條物色
영혼만 오르내린다 / 陟降英靈

  등의 표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벽 위에다 절구絶句 한 수를 적어 놓았는데, 이것 역시 완곡한 표현으로 풍자하는 뜻을 붙였었다. 함께 입직했던 백대형白大珩과 신의립辛義立 등은 이것을 보고 이이첨에게 고자질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역적을 비호한 부도不道한 죄목으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광해光海가 진노震怒하여 궐정闕庭에서 친국親鞫을 하자,

 

 공이 진술하기를, “신이 옛날에 행궁行宮에서 일을 맡아 보다가 선왕先王의 옥안玉顔을 뵌 이후 평소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옛 궁궐의 유적遺跡을 보고는 슬픈 느낌이 들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글을 지었을 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형신刑訊을 받을 때는 말과 얼굴빛이 더욱 엄숙해지면서 “선왕 생각을 하였다.”는 말만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몇년 동안 그대로 감옥 속에 있다가 반정反正을 맞아 석방되면서 곧바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겨졌으며 다시 조금 뒤에 체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 늙은 몸으로 감옥에 갇혀 고초를 혹독하게 겪는 바람에 노환老患이 심해지기만 하였는데, 3년이 지난 1625년 5월 3일에 향년 6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재 조우인 선생 문학비
이재 조우인 선생 문학비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공을 친애親愛하는 사람은 적은 반면, 공의 허물을 들춰내려는 자들은 많았다. 정인홍鄭仁弘의 권세가 조야朝野를 압도하고 있을 때 공은 매번 그를 대간大姦이라고 배척하였으며, 일찍이「대개천설大開川說」을 지어 그의 패거리들을 비난하며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또 벗에게 보낸 글에서, 남명南冥의 강해講解에 대한 천심淺深을 논하면서 그의 유서遺書를 한데 모아 분류해 보려고도 했었다. 결국 이로 인해 끝내 화망禍網에 걸려들기도 하였다.

 평소 가정 살림은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그래서 옥사獄事를 겪은 뒤로는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처자妻子가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게 되었지만 공은 조금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직 산수山水만을 좋아하여 감상하곤 하였는데 소싯적부터 국내의 유명한 승경勝景은 거의 돌아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만년에 들어서는 상주에 터를 잡고 매호정사梅湖精舍를 지어 자신의 호號로 삼고 즐기곤 하였다. 문장을 지을 때면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시상詩想이 샘솟듯 하였다. 그러면서도 저절로 시문의 법도에 들어맞곤 하였다. 그리고 필법筆法 또한 진서眞書와 초서草書에 두루 능하였으므로 이를 입수하는 이들이 모두 보배로 여겼다. 그런가 하면 또 회화繪畫에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으니, 그야말로 시詩ㆍ서書ㆍ화畫 삼절三絶이라고 일컫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 밖에 악률樂律 등에 있어서도 대부분 한번 손을 대기만 하면 능란한 경지에 들어가곤 하였다.

이제 조우인 선생 매호별곡 시비
이제 조우인 선생 매호별곡 시비

 하지만 시(詩)에 있어서만은 꽤나 전일하게 공력을 기울였는데 청준淸俊하고 전아典雅한 면에서 이따금씩 당시唐詩의 경지에 육박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공이 이로 인해 명성을 얻기는 하였지만 또한 이 때문에 화禍를 초래하고 말았다.

 공의 아들 정융挺融은 1631년에 문과文科 급제하였다. 아우 희인希仁 역시 문과에 급제한 신분으로 현재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이재 조우인의 친필과 그림은 현재까지 드러난 것이 거의 없다. 창작물 가운데 가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매호별곡은 1624년경 은거하던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한가롭게 살아가는 은일사隱逸士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고, 자도사는 광해군이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못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풍자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그의 나이 61∼63세 때에 지은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속관동별곡은 만년에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젊었을 때에 유람하였던 관동지방의 여행소감을 추억하며 정철의〈관동별곡〉과의 중복을 피하여 지은 기행가사이다. 출새곡은 1616년 가을에 경성부사로 제수되어 이듬해 봄에 변방의 산천풍토와 봄놀이를 두루 즐긴 뒤, 서울의 흥인문을 떠나 임지인 경성에 다다르기까지의 노정에서 얻은 견문과 임지에서의 봄놀이, 그리고 변방 목민관의 고독감 등을 노래한 기행가사이다.

매악산 정상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매악산 정상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상주지역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우복 정경세와 창석 이준 등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재 조우인은 시서화 세 분야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어진 점이나 앞서 언급한 유명 가사를 남긴 점만 봐도 상주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벌면의 매호리는 임호정과 이재 조우인 시비 그리고 어풍대 등의 유적이나 기념물이 있지만, 영남지역 가사문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홍보하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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