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국인 모두의 고개 새재 <상>

이정록

 조선의 개국과 때를 같이하여 열린 새재는 영남대로의 철리길 중 가장 험준한 곳이며 또한 요새다. 제 3관문인 조령관이 있는 새재마루는 해발 642m로서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고개 중에 높은 고개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주변에 1천미터 안팎의 높은 산들이 둘러있어 그 어느 고개보다 심산유곡에 위치한 고개이다.

 
 

 시인 김하돈은 그의 저서 [고개를 찾아서]에서 <백두대간을 넘어가고 넘어오던 숱한 민중들의 발품의 역사는 그 길섶에 고스란히 묻혀 있다. 조선왕조 5백년이 흐르는 동안 새재는 그렇게 나라 산천에 걸린 수많은 고개 중의 고개로 무릇 조선 팔도 고갯길의 대명사가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문경사람들만의 고개가 아니었다. 조선 사람 모두의 고개였다. 새재를 넘었던 또는 새재를 넘지 못했던 간에 조선사람 모두의 가슴 속에 간직한 응어리가 문경새재이고 굽이굽이 눈물을 흘리며 넘어야 하는 운명 같은 고개가 문경새재였다. 그렇기에 숱한 애환이 담긴 고갯길이며 고달픈 역사가 함께한 고갯길이며 겹겹이 설움이 쌓인 고갯길이 새재였다.

 문경읍에서 동쪽으로 신북천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901번 지방도로는 계립령과 여우목 고개로 통하는 길이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 능선을 잘라 만든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국도3호선으로 연결되는 이화령과 옛길인 새재로 통하는 길이다. 산 능선을 넘으면 바로 진안리이고 진안삼거리에서 조령천을 건너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국도 3호선인 이화령으로 가는 길이고 진안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조령천을 따라가는 길이 옛길인 영남대로로서 새재로 가는 길이다.

 
 

 신라 초기에 열린 계립령이 12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관도로서의 역할을 해오다가 조선조 초기에 새재에게 그 기능을 넘겨주고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선 실록에서 새재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태종실록 권5 태종3년 6월조>에 조세로 거두어들인 세곡을 운반하는 문제로 수차례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조선은 개국을 하면서 왕권을 확립하는 한편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사한 관계로 지방에서 많은 세곡을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여야 했다. 경상도에서 거두어드린 세곡을 남해와 서해를 경유하는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그때가 음력 10월이라 북서 계절풍이 심하게 몰아치는 때라 세곡 운반선이 심한 풍랑에 견디지 못하고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여 세곡운반 문제가 당시 조정에서는 큰 걱정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육로로 운반한다면 그 엄청난 세곡을 수례로 운반 하여야 하는데 그때 까지만 해도 도로 사정이 열악한 터라 육로 운송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세곡을 바다로 운송할 할 것인가 아니면 새재를 넘어 충주 경원창까지 육로로 운반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수년간 논의를 거듭한 끝에 바닷길을 이용하지 않고 새재를 넘어 육로로 운송하기로 어렵사리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새재는 태종 14년(1414년) 새로운 관도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새재는 계립령으로부터 관도의 역할을 승계 받아서 <새로 난 길> 이라는 의미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

 
 

 억새풀이 많은 고개여서 새재, 하늘을 나는 새들조차 넘기 힘들어 한다는 새재, 또한 천년 옛길인 계립령을 곁에 두고 새로운 고갯길이 열렸다하여 새재, 모두 다 새재다. 새재와 조령은 같은 고개를 이르는 말이지만 새재라는 이름으로 더 불리어지는 이유는 새재가 세 가지 모두를 아우르는 이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새재는 조령보다는 우리들과 더 친숙해진 이름이다.

 개성 명기 명월(明月)이 사모했던 양곡 소세양은 새재를 넘으면서 조령(鳥嶺)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 한수를 남겼다.

鳥嶺  

石經躡雲高 돌길을 높아 구름을 밟는 듯 하고 

縈紆三十里 굽이굽이 휘돌아가는 삼 십리 길

人行喬木杪 사람들은 교목(喬木:키 큰 나무)사이 스쳐 지나고

馬入翠屛裏 말은 푸른 병풍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네.

양곡 소세양 (陽谷 蘇世讓1486~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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