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소리, 겨울 내음.

고 순 덕

 

 “야들아 인제 고만 놀고 들어 온네이.” 풀이 말라버린 뒷동산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산태를 타다보면, 집집마다의 굴뚝엔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온 마을을 연기구름으로 뒤덮어 버린다. 이를 뚫고 들려오는 젊으신 엄마의 우렁찬 음성. 이산저산의 갈비(솔잎)를 끌어 모아 아궁이를 데우는 내음 가득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갈잎 타는 내음. 겨울을 따뜻하게 하는 소리요 내음새 이다.

 
 

 초겨울이면 떡하니 아랫목을 차지한 삶은 콩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메주콩을 삶던 날 한소쿠리 따로 덜어낸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삶은 콩들을 깨끗이 정리한 지푸라기를 깔고 신주단지 모시듯 아랫목에 모셔두고, 아버지의 입지 않는 털 잠바를 덮어주고도 모자라 솜이불까지 덮는다. 이불속에 발을 넣고 엎드려 텔레비전을 보다가 동생과 발장난으로 혹시라도 이를 건드리면 등짝에 불이 난다. “이 마한년들이 어딜 발로, 인나 앉아 안보나? 숙제는 다 했나?” 엄마는 저깟 냄새나는 콩소쿠리가 우리 딸들보다 귀한가? 갑자기 숙제는 왜? 원망의 입이 실룩거린다. 그렇게 사나흘 아랫목을 차지하던 콩소쿠리는 갈수록 꼬리꼬리한 냄새를 풍기고 드디어 아버지의 털 잠바를 벗어던지던 날 히끗히끗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엄마가 절구질을 시작하면 길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다.

 
 

  이 절구질은 메주콩을 빻는 것보다 훨씬 힘이 들고, 냄새까지 역겨웠다. 그리고 저녁상에 오른 청국장. 울엄마는 청국장을 신김치나 김치 속에 무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 잘 익은 것을 함께 넣고 끓이기를 즐겼다. 그 때는 청국장에 꼭 두부와 대파를 넣어야 한다는 공식도 없었나보다. 쾌쾌한 냄새와 두부도 하나 없는 청국장이 어린 입맛에는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신김치가 들어간 청국장이야 말로 그 맛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 중에 별미였다. 뽀골뽀골 청국장 끓는 소리와 내음이 눈 내린 초가위에 보름달을 부르는 겨울의 소리와 맛이 아닐까?

 
 

 눈 내린 다음 날 햇살이 비추면 슬레이트지붕 끝에 줄줄이 늘어선 팬파이프 같던 고드름들은 똑똑똑 맑은 물방울 소리로 합주를 하고, 쩡쩡거리며 울부짖던 얼음위의 하얀 줄무늬는 마을 머슴아이들을 방에서 불러냈다. 고드름을 따다가 키 재기에 칼싸움, 얼음과자를 먹듯 와작와작 깨 먹기도 했다. 엄마의 당부는 아랑곳 않고 연당으로 달려 들어가,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빠지지나 않을까 가슴을 조이면서도 더 깊이, 더 멀리 들어가는 호기를 부렸다. 밤새 깍고 색칠한 팽이는 얼음 위에서 돌려야 재 맛. 닥나무 가지와 껍질로 만든 채찍을 연신 후려쳐 팽이가 쌩쌩 살아나면, 이번엔 적진을 향해 돌격. 상대팽이와 몸싸움 한판을 벌인다. 작은오빠의 커다란 씨다마(쇠구슬)를 박은 왕팽이가 마을을 재패하는 날은 괜찮지만, 만약 오빠의 팽이가 다른 팽이와 붙어서 먼저 죽는 날은 동생과 나도 죽는 날이다. 신경이 곤두선 오빠는 방청소는 했냐? 숙제는? 텔레비전 볼 때 조용해라 등등 잔소리가 아침 등굣길 앞이마를 적시는 서릿발 같다.

 
 

 그렇게 화가 난 작은 오빠의 눈치를 보며 기가 죽은 동생과 내가 전전긍긍 졸린 눈을 비벼가며 메주 뜨는 냄새 가득한 상방에서 숙제를 하다보면, 작은 오빠는 소죽끓이는 아궁이에 넣어 두었던 군고구마를 썬데이 서울이란 잡지에 바쳐 들고 들어온다. 반쯤 두툼하게 바짝 타버린 껍질을 떼어내면 노오란 고구마 속살이 ‘나 잡아 잡수슈!’ 잔김을 피어 올리고, 방안 가득한 메주 뜨는 냄새를 싸악 군고구마가 덮어 버린다. 그리고 작은오빠에 대한 동생과 나의 서운함도 함께.....

 뽀드득뽀드득 밤새 내린 눈 위에 첫발자국 남기는 소리는 즐겁고, 잘 익은 김치 내음은 삶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 도심 거리에 울려퍼지는 구세군의 종소리와 군밤, 달고나 내음은 깊고 어두운 겨울의 모닥불과 같다. 겨울비 내리는 날 마당을 부딪는 빗방울 소리 벗 삼아 추억해 본 그 날의 겨울 소리와 겨울 내음.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고향의 소리요, 엄마의 내음이다. 따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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